
티베트어로 무슬림은 ཁ་ཆེ་까체로, 이 단어 자체가 카슈미르인을 의미한다.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발칸 반도에서는 현재까지 무슬림을 부르는 단어로 "터키인"이 관용어로 쓰이듯이, 티베트에선 "카슈미르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것이다.
정교政敎일치 국가였던 티베트는 역사적으로 불교가 절대다수였고 다른 종교가 차지할 비중은 전혀 없었다는게 대중들의 흔한 인식이지만 그렇지 않다.
티베트는 8세기 경부터 아르바브,네팔,카슈미르의 무슬림들과 지속적인 교류관계에 있었으며 (물론 다수가 카슈미르 출신이겠지만) 이렇게 유입된 라싸의 무슬림들은 티베트 여성의 통혼 등으로 그 규모를 불려가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편의상 카슈미르계로 칭)
17세기 말 규모가 상당해진 라싸 내의 무슬림 공동체는 당시 티베트의 지배자인 5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가 "마스지드를 지을 땅과 무슬림들을 매장할 땅을 주었으면 한다" 라 청원하였으며 달라이 라마는 이를 "화살을 한발 쏠 테니, 그 화살이 떨어지는 곳이 너희들의 땅이라" 라는 말로 너그롭게 받아들여 1716년 지금의 라싸 마스지드가 건걸되었고 무슬림 매장지도 생겨났다.
카슈미르계 무슬림 공동체는 이렇게 티베트에 뿌리내렸고, 그들은 상업과 도축업, 요식업등에 종사하며 티베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티벳'이라는 명칭은 북동부의 돌궐-몽골족을 남부의 티벳인과 중복시켜서 생겨난 혼동의 결과일것이다. (중략) 중국인들은 토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단어는 돌궐-몽골족의 일파인 독발(독발선비를 의미)와 혼동되었으며, 그 원음은 아마 Tuppat과 비슷했을 것이다. 같은 시기의 돌궐과 소그드 문헌은 현재 티벳의 북동부에 위치한 'Tüpüt'라고 불리는 종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무슬림 저자들이 9세기 이래 사용했던 단어이다(Tübbet,Tibbat 등)
-티벳의 문화 중
사족으로, 혼동에서 빚어낸 단어이긴 하지만 심지어는 티베트Tibet 라는 영어 호칭 또한 무슬림 학자들이 처음 발굴해낸 것이다.
현재 라싸에는 역사가 깊은 카슈미르계 무슬림 공동체 말고도 다른 무슬림 공동체가 존재하는데, 그들은 누구일까?

바로 후이족(회족回族) 들이다. 티베트와 위구르 등 분쟁의 요소가 있는 지역을 대륙화하고, 그 지역의 경제를 중국 본토에 종속시키기 위해 점령 이후 지속적으로 시행중인 중국 당국의 외부인의 티베트 이주정책으로 티베트에 발을 붙이게 된 이들은 주로 라싸 마스지드 근처에 살고 있는데, 그것이 카슈미르인들을 위해 세워진 마스지드임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가진 종교는 보통의 티베트인에게 이질적일지도 몰라도 그래도 수백년은 티베트에 뼈를 묻고 살아온 "원주민" 카슈미르계 무슬림들과 다르게 완전한 이방인이다. 그래서인지 1959,2008년 라싸 내에서 반중 소요가 일어났을 당시 분노한 티베트인들에 의해 이들이 출석하는 라싸 마스지드가 공격당하고 파괴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이슬람포비아적 행위는 단순히 독립을 원하는 자들의 민족주의적 담론으로써 티베트인들이 자신들의 보편종교인 불교를 민족의 하나뿐인 신앙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곧 이슬람 혐오 정서로 비롯되었다고만 볼 수 없고 피로 얼룩진 역사가 존재한다..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신생 티베트의 일부 강경한 백성들은 행정상으로는 "중화민국"의 사천(캄),칭하이(위)에 속하나 문화적으로는 티베트의 강역에 속하는 영토를 정복하기를 원했고,
중화민국 또한 떨어져 나간 티베트를 다시 수복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1931년 1월 티베트 중앙정부에 불복하는 캄파들을 이용해 캄 지역에 대한 중국군의 완전한 지배를 이루어내기 위해 사천성 주석, 국민혁명군 24군(사천군) 대장 류문휘는 캄에서 벌어진 개뽀 가문의 재산상속 문제에 대한 개뽀와 사찰의 분쟁에 끼어들어 티베트군을 공격했으나 되려 반격당하고 영토가 뺏길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칭하이를 지배하던 후이족 무슬림 군벌 마부팡의 개입으로 사건은 본말전도가 된다.

이미 마부팡을 포함해, 칭하이를 지배하는 마馬씨 집안은 칭하이의 티베트인들에게 증오받는 대상이였다.
그의 아버지 마기는 칭하이의 완전한 지배를 위해 자신의 후이족 군대를 통솔해 칭하이 내의 가장 영향력 높은 불교 사원인 라브랑 사원을 점령했고 1918년, 1925년 발발한 라브랑 사원을 되찾기 위한 티베트인들의 무력시위엔 그들을 모두 살해하는것으로 해결을 보았고, 격노한 티베트인들 또한 중국인 배의 포로를 갈라 살해하는 등의 폭력의 연쇄를 낳았다.
1927년 마기는 라브랑 사원에서 후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라브랑 사원은 완전히 약탈당했고 라브랑 인근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탐험가 조셉 록(Joseph Rock)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

"당나라에서 시작된 실크로드 무역. 아랍 무역업자들과의 혼인을 통해,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들은 신체적으로 강력하고 승마에 능숙했으며, 티베트, 몽골, 한족에 맞서 현재 간쑤성, 닝샤성, 칭하이성, 신장성의 일부인 그들의 넓은 영토를 방어하고 확장하는 데 주저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년도 채 되기 전에, 미국의 식물학자 조셉 록은 1709년에 세워진 라브랑에 있는 거대한 불교 수도원의 벽에 올라왔고, 잘린 티베트 전사들의 머리로 꾸며진 2,000명의 승려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정황상 승려들의 시체를 의 미하는듯) 해골은 평야에 널려 있었는데, 수세기 전의 칭기즈칸의 대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악마의 작품이었다."
"무슬림들은 여성 병력들을 전멸시켰다. 이 2천명의 여성들은 지역 노예 시장에서 살해되고, 고문당하고, 강간당하고, 팔렸다." 문제의 진실은 그들이 장정에서 겪은 최악의 잔인함에 시달린 지 5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여성들의 이야기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강은 군대를 양성하고 중국 역사를 결정짓는 데 운명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10월 24일, 제4군은 양가죽으로 덮인 뗏목을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했고, 마기의 아들인 군벌 마부팡과 마부칭의 느슨한 영역으로 들어갔다. 서른한 살의 야심 찬 사단장 마부팡은 최근 마린이 순례길에 오른 동안 숙부 마린으로부터 칭하이 성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마부팡보다 7살 많았지만 은퇴한 마부칭은 카리스마 넘치는 동생의 지휘를 맡았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마부팡을 지원했으며, 장개석은 마부팡에게 "칭하이로 들어온 티베트군을 격퇴하라" 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류문휘와 마부팡의 협동 공격에 티베트군은 달라이 라마가 친정해 지휘를 했음에도 패배하여 후방으로 철수했으며, 달라이 라마는 마부팡이 칭하이 남부를 티베트령으로 할양하는 대신 티베트군이 칭하이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맞고자 하였으나 마부팡은 이를 거절했고 달라이 라마는 악화되어가는 전세에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병을 얻어 노블링카로 돌아갔다.
돌아온 달라이 라마는 본인이 사망할 때를 대비해 티베트의 불교와 중생이 참화를 당할것을 걱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한 이후 마부팡과는 타협을 보고 모든 총력을 류문휘와의 대결에 집중하려 했으나, 이를 비웃듯이 중국 정부는 마부팡에게 탄약 5만발을 추가로 지원한다. 이에 힘을 얻은 마부팡과 류문휘의 협공에 티베트는 라싸까지 밀리는가 하였으나...
하지만 티베트에게는 운 좋게도 류문휘의 조카 류상이 그를 배반하고 류문휘의 본거지인 사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장 불을 꺼야했던 류문휘는 청두로 돌아갔고, 마부팡과 티베트의 1대1 구도가 되었다.
티베트군은 거듭된 패배로 더 이상 효율적으로 기동할 수 없었고 마부팡은 류문휘와 류상이 벌이는 사천에서의 내전으로 힘이 빠진 가운데 티베트를 공격해봤자 패배할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린 장개석의 말을 따라 티베트군을 공격하지 않았고, 1933년 칭하이 내의 사찰만 티베트 중앙정부가 다스리는 조건으로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렇듯 후이족과 티베트는 악연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후 티베트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해방"된 이후 칭하이,닝샤의 후이족은 중국 당국의 정책으로 지속적으로 티베트에 유입되었으며, 상술했듯이 라싸 모스크 근처에 본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과 달리 이들은 티베트 현지인들과 통하지도 않고 있어 티베트인들에게 후이족이란 이전에 전쟁을 했던 적의 민족이자 자랑스러운 불교 사찰을 파괴한 악의 근원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인 앙금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후이족들을 들여놓고 본 중국의 정책은 티베트인들의 쌓여온 분노만 터트리는 격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티베트인과 후이족 사이엔 냉랭한 기류가 생기며 수백년간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도 원만히 교류하며 티베트에 살아온 원주민인 카슈미르계 무슬림들만 후이족들과 같은 이슬람이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는 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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لا يَنهاكُمُ اللَّهُ عَنِ الَّذينَ لَم يُقاتِلوكُم فِي الدّينِ وَلَم يُخرِجوكُم مِن دِيارِكُم أَن تَبَرّوهُم وَتُقسِطوا إِلَيهِم ۚ إِنَّ اللَّهَ يُحِبُّ المُقسِطينَ
하나님은 종교를 이유로 너희에게 대적하지 아니하고 너희를 저희 주거지로부터 추방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친절하고 그들과 공정하게 거래하는것을 금지하지 아니하셨나니 실로 하나님은 공평하게 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니라
-성 꾸란 의미의 한국어 번역 60:4
그는 나를 욕했고
그는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이겼고
그는 내 것을 앗아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미움으로부터 길이 벗어날 수 없다.
-법구경 1장 3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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